[자연에서]리뷰/임가영

‘바라보는 것을 통해 참여하는 즐거움’

임가영 (예술가)

이 공연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은 것은 올 8월이었다. 나는 그 때 장애인 극단 판의 바디퍼커션 연극 <우리와 함께 춤을>의 무대 미술과 영상 기록 일을 돕고 있었다. 우리는 성북마을극장 빌딩 옆 흡연 공간에서 쉬고 있던 중이었다. 본격적으로 날이 더워져 온 세상이 뜨겁고 끈적했다. 극장 안의 세찬 에어컨 바람에 시달리다 밖으로 나와, 답답한 번화가의 열기 속에서 다같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데 아마도 한얼님이나 한솔님 둘 중 한 분이 10월에 녹녹의 야외 공연이 있으니 보러오라는 말을 건냈던 듯 싶다. 이상하게도 돌연 어떤 소중한 것을 약속받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 쯤이면 지금의 이 정신없는 일정들이 다 정리가 됐겠지. 캘린더의 몇 장을 뜯어내고 단숨에 그 시간으로 가고 싶어졌다. 진빠지는 더위도 싹 사라져 있을테고, 10월의 야외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겠지. 그리고 내게는 단풍진 나뭇잎과 부스럭거리는 갈대숲, 서늘한 바람 사이에서 녹녹이 하는 공연을 바라보는 일만이 남아있을 것이었다.
그때 녹녹의 공연을 기대하는 마음을 떠올리면 ‘바라보는 것을 통해 참여하는 즐거움’을 다시 느끼게 된다. 이것은 창작자가 아닌 온전히 관객으로서의 즐거움, 그 중에서도 공연의 관객이 느끼는 즐거움일 것이다. 객석에 둘러앉은 관객들과 나는 하나의 무리가 된다. 마치 오래된 친구나 동료처럼 이 안전한 공동체의 일부가 되어, 눈 앞에서 벌어지는 다채로운 움직임을 응시하고 퍼포머가 전달하는 감각에 자연스럽게 응하기만 하면 된다. 당시의 나는 여러 가지의 사업들, 약속들, 창작 활동에 지쳐 있어서 너무나도 이것이 필요했다.
나는 개인전을 하고, 워크숍을 마치고, 책을 위한 원고를 마무리하고, 많은 예술인들이 9월에서 10월을 날때 그러듯 쉴틈없이 일을 해치웠다. 그러다 어느 사이엔가 공연날이 되었다. 공연 당일, 나는 준비를 했다. 무릎 담요를 둘둘 말아 빈 텀블러, 쿠키 두어봉지와 함께 가방에 불록하게 넣은 다음, 바람을 막을 얇은 옷 몇 개를 껴입고 두툼한 양말과 운동화를 신었다. 그밖의 다른 어떤 것도 챙기지 않았다. 오후 녹녹의 공연 일정 이외에는 아무 스케쥴도 없었고, 딱 필요한 것들만 홀가분하게 들고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연이 벌어지는 숲 바로 앞 커피숍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로 텀블러를 가득 채웠다. 이것도 미리 계산한 관람 준비 과정 중 하나였다. 공연 시작 시간에 아주 약간 늦은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공연 장소는 메인 산책로에서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데크 위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공연이 시작되고 있어 관람석 대부분이 꽉 차 있었다. 데크 위, 그리고 주변 숲에서 약간의 습기가 올라와 전체 풍경은 짙은 고동색톤으로 물들어 있었다. 해가 짧아져 무대 위치를 밝히는 주홍색 조명 밖으로 벌써부터 어둑어둑 날이 저무는 기색이 스며들고 있었다. 나는 왼쪽 사이드 자리에 앉아 천천히 무릎 위에 담요를 펴고, 텀블러 뚜껑을 열어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들이키며, 오묘한 빛깔로 물든 가을 숲을 배경으로 녹녹이 경쾌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단풍진 나뭇잎과 부스럭거리는 나뭇가지, 서늘한 바람 사이에서. 나는 그 순간을 이미 두달 전부터 매우 구체적으로 예감하고, 또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관객석에 앉는 것 만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큰 만족감을 느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 감각이 올해 경험한 그 어떤 것보다 특별하고 또 강렬한 것이다. 하지만 왠지 이 만족감만을 공연 관람 리뷰나 감상으로 말하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말할 수 있는 것이 뭘까? 글을 써가는 이 시점에 다시 그 때로 돌아가 건져올릴 만한 것은 뭘까?
나는 비평가도 공연을 만드는 사람도 아니지만, 한 가지 생각한 것은 녹녹이 공연에서 ‘판타지'를 사용하는 방식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것이다. ‘판타지' 라는 단어가 공연 설명이나 녹녹의 입을 통해 사용된 적이 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하지만, 2022년 말 산울림소극장에서 녹녹의 공연을 처음 봤을 때부터 항상 이들의 공연에 판타지를 활용하는 무척이나 은근한 방식이 들어있다고 느꼈다.
이 때의 판타지는 이상향이나 꿈, 동화적인 것이 공연을 통해 살아남듯 전달되는 것을 말한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러한 이야기의 세계가 특정한 내러티브의 온전한 전달 여부와 상관없이 우리의 몸에 어떤 감각을 남긴다는 것, 그리고 공연을 통해 우리가 이 감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구체적으로 나는 녹녹이 퍼포머의 의상이나 표정, 조명, 소품, 음악을 통해 이 ‘판타지'의 감각을 조각조각 그려내고 있는듯 느끼는 것 같다. 바디 퍼커션이라는 기법, 몸을 악기 삼아 다양한 울림소리와 리듬을 만들어내는 활동과 내가 느끼는 이 판타지의 만남에 대해 어떤, 더 진전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다만 무수히 다르게 펼쳐질 수 있었던 공연의 방식 속에서 녹녹이 선택한 것에 대한 생각을 할 뿐이다. 무대 뒤 숲 속에서 요정처럼 등장하던 퍼포머들, 옛 마을의 촛불이나 램프빛처럼 오렌지색으로 아롱거리던 조명들, 쭈야님이 연주하던 바이올린, 퍼포머의 권유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젓다가 냉큼 동작을 따라하던, 앞 쪽의 돗자리 위에 쪼르르 앉아있던 작은 아이들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8월의 무더위와, 달력을 가득 채우고 있던 끝없는 일정들 앞에서 아직은 일어나지 않았던 <The Sound Dance>의 관람 경험을 떠올리며(예상하며) 느꼈던 것을, 시간의 순서를 뒤섞어 놓아본다. 결국 나는 공연을 보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안심하고 부드럽게 만족했을 것이다. 나의 몸 안에 항상 있었을 판타지의 감각이 둥글게 오므린 손바닥으로 무릎 위나 가슴팍을 가볍게 찰싹거릴 때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또 다시 녹녹의 공연의 보거나 과거의 공연을 뒤돌아 되새길 때마다 일어날 일일까, 그렇다면 그건 또 얼마나 기대되는 일인가, 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