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리뷰/이상

다음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실 건가요? 

이상(연출가, 이상의 이상)

1.
예술에 있어 ‘무한한 가능성의 확장’이라는 개념은 ‘무한한 가능성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예술에 국한되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여기 이런 명제가 있다. ‘현대음악은 모든 소리다.’ 이 명제로부터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고, 또 어떤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는가? 반대로 말해보자, ‘모든 소리는 현대음악이다.’ 여기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고, 또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질문을 교차하며 쌓아가보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이고, 실현할 수 없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가능성은 무엇이고,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엇인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고, 실현할 수도 없는 것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하는가?

바디퍼커션 그룹 녹녹(이하 녹녹)의 공연을 보고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잠겼다.


2.
녹녹은 일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리들을 인간의 몸이라는 도구를 통해 변환하여 리듬을 창조하는 작업을 해왔다. 주로 관객참여형 공연과 워크숍을 통해 관객들을 만났다. 이들의 작업을 관통해 온 키워드는 ①참여 ②놀이 ③커뮤니티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키워드들은 이들이 2022년 12월 진행한 <바디뮤직콘서트 – 노크> 공연에서도 유효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아래에서 다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한 편, 이 공연은 바디퍼커션을 메인으로 1시간 동안 진행되는 단독 공연이었다.

˹바디퍼커션으로 1시간을 채우는 콘서트˼ 

이 콘서트는 어쩌면 ‘음악 자체로서의 바디퍼커션’ 그리고 ‘공연 자체로서의 바디퍼커션’이 지닌 (불)가능성에 대한 녹녹의 실험이자 도전이었을지도 모른다.


3.
공연은 녹녹의 연주에 집중하는 파트와 관객의 참여를 제안하는 파트가 지속적으로 교차하며 진행되었다. 파트와 파트 사이의 기본적인 조명 전환 그리고 연주자들의 이동과 역할 재분배 등으로 형성되는 공간 전환만으로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이어졌다. 

연주파트에서는 바디퍼커션만으로 채우는 곡과 바이올린, 아코디언 등 다른 악기가 결합하는 형태의 곡들이 고루 있었다. 이 다양한 형태의 곡들을 모두 녹녹 멤버들 자체만으로 연주한 점이 공연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전환하고 이어가는 포인트 중 하나였다. 곡의 분위기와 어우러지는 조명과 영상이 함께 했고, 때로 연주자들은 작은 소품을 활용한 퍼포먼스를 전개하거나 유닛을 이루어 연주를 진행하기도 했다. 

공연을 보면서 여러 트랙리스트를 이어 듣는 콘서트라는 느낌보다 하나의 극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아마도 이런 다양한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흐름이 그런 기분을 들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여러 시공간으로 순간 이동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숲속으로, 1980년대 힙합 음악이 나오는 뉴욕의 거리로, 혁명을 도모하며 토론하고, 좌절하고, 환희하는 60년대 유럽의 지하살롱과 여유가 흐르는 일요일 오전의 카페테라스로, 별이 총총히 뜬 밤에 친구들과 함께 오순도순 모여앉은 다락방으로,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담배연기 속으로. 이 공연이 내가 실제로 가본 적 있거나, 가보지 못했던 시공간들로 나를 데려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는 이들의 음악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다양한 요소들이 이들의 음악과 결합했을 때 나온 시너지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지점은 ‘서사가 아닌 형태로 구성되는 극의 (불)가능성’을 상상하게 했다. 서사와 텍스트가 없음에도 음악을 통해 관객의 내면에서 극이 창조되는 작업의 (불)가능성- 내게 이 공연은 ‘녹녹과 함께 떠나는 시공간 이동 여행극’이었다. 

4.
 한 편, 공연장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인상적으로 다가왔던 건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었다. 7~8살 즈음으로 보이는 사람들부터 2~40대 사이의 또래들 그리고 6~70대로 보이는 어른들 등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다양한 연령대의 낯선 사람들과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해 보았지?’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해졌다.

  관객의 참여와 관련하여 인상적이었던 점들이 있다. 우선, 일원화되지 않은 방식으로 참여를 제안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객의 참여를 제안하는 적절한 빌드업 단계를 거쳤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부담 느끼지 않고 해볼 수 있는 박수치기 정도로 참여를 제안하고, 이후에는 암전 속에서 그림자를 활용하여 더 복합적인 참여를 시도한 뒤, 이후로는 다양한 소리와 몸짓으로 이 공연에 대한 관객의 참여를 확장하는 과정과 방식이 재미있고, 유효했다. 

 녹녹의 공연에서 이러한 관객의 참여를 통해 일어나는 것은 놀이를 바탕으로 형성되는 커뮤니티다. 여기에서 ‘놀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운동이 실천으로 세상을 향하고, 철학은 개념으로 세상을 향하며, 종교가 영적인 세계를 통해 세상을 향한다면, 예술은 결국 감각으로 세상을 향하는 방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녹녹의 공연은 아이들이 놀 때의 감각, 놀이의 감각으로 세상을 향유하게 한다. 그리고 이를 개인의 감각을 넘어 공동의 협력으로 확장시킨다. 그 순간, 놀이는 모두가 함께 만드는 음악이 된다. 

 이 공연에서도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들이 일시적으로나마 놀이를 바탕으로 한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공동의 음악을 연주하는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 


5.
 이미 이야기했듯 이 공연의 중심은 음악, 즉 퍼포머들의 연주였다. 그 연주는 (당연하게도) 필연적으로 ‘몸짓’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녹녹은 그 자연스러움을 움직임으로 확장하였고, 그것은 어떤 형태의 ‘안무’가 되었으며, 때로는 ‘타블로 사진의 영상화’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지점이 공연을 통해 내가 시공간을 이동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 또 다른 결정적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한 편, 공연에는 녹녹과 관객을 제외한 또 다른 공연자 두 사람이 있었다. 관객석에 앉아있다 어느 시점에 무대로 나온 그들은 이전 녹녹의 워크숍을 경험했던 참여자였다. 개인적으로 이 시도가 좋았다. 녹녹이 가져온 ‘커뮤니티성’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 주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활동 속에서 관객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작품 안에서는 그 관객들이 어떤 위치에까지 놓이게 될 수 있을지에 대한 상상. 그리고 이것이 확장된다면 그 속에서 자연스레 수행될 ‘과정’과 그 ‘결과’가 지닐 수 있을지 모를 (불)가능성에 대해 상상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커튼콜 때, 녹녹은 모든 스텝들의 이름을 샷아웃했다. 공연 하나 올라가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협력과 도움, 연대가 필요한 것인지 절실히 느끼는 입장에서 이 순간이 너무 감동적이었다. 이 말을 굳이, 꼭, 하고 싶었다.


6.
 녹녹은 이번 콘서트를 통해 ‘공연으로서의 바디퍼커션’이 지닌 그들의 (불)가능성을 확장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음악으로서의 바디퍼커션’이 자리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증이 다시 생긴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전형적인 음악’- 3분에서 5분 사이의 곡으로 녹음된 사운드가 재생되는 트랙- 으로서 이들의 바디퍼커션은 어떤 (불)가능성을 지닐 수 있을까?

 마침 이들은 공연 시기에 맞추어 2곡의 바디퍼커션 연주곡으로 구성된 싱글 앨범 ‘Swimming Fly’를 발매했다. 들어보지 못한 분들은 들어보시면 좋겠다.

 나는 CD를 선물 받았으나, 아직 들어보지 않았다. 공연의 여운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여운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게 될 어느 날, 음원을 들어보려 한다. 그때 그 음악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이들의 행보를 기대하며 기다리기로 한다.

‘다음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