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크]리뷰/양기민

몸으로 초대하는 환대의 세계

양기민(시민자치문화센터 이사, 문화연대 집행위원)

1.
공연을 본 날은, 10.29 참사가 한 달이 지나고, 대한민국이 16강에 올라간 다음 날, 주말 오후였다. 그래서였을까. 마스크에 가려졌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유독 밝아 보였다. 답답했던 마음으로 얼어붙었던 사람들이 하루 만에 잠시나마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니. 어떤 공연이든 중요한 시작은 관객이 어떠한 마음으로 보는지가 중요할지 모른다. 물론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중요한 것처럼.

2.
바디뮤직콘서트 노크는 숲속에서부터 출발한다. 웃음을 보이며 등장하는 공연자들은 먼저 모인 관객들과 박수를 함께 나누는 것으로 시작한다. 관객과 공연자들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초대하는 사람과 초대받은 사람들이 함께 공연장이란 공간은 모두의 장소가 된다. 공연자들은 관객들을 새로운 장소로 초대한다. 초대된 장소는 익숙하지만 미지의 세계였다. 아름다운 요정들이나 순수한 원주민들이 울창한 숲에서 자연을 만끽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을 것 같은 어떤 세계를 연출하며, 관객들은 공연자들과 조우하게 된다.

3. 
어떠한 공연이라도, 하나의 상상의 세계를 만들기 마련이다. 다만 관객이 그 연출자들이 어떠한 마음과 태도로 몰입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모험을 할 수도 있다. 미지의 낯선 신기한 세계를 호기심을 갖고 위험을 해쳐가고 있는 용기가 필요할 수도 있다. 탐험일 수도 있다. 낯선 세계의 무언가가 있다는 기대를 통해 찾아가려는 노력. 모험과 탐험은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과정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나를 중심으로 놓고 새로운 세계를 비정상성을 해석하려는 자세이다. 이러한 태도가 극단적으로 되면, 식민지 개척의 약탈적 관점으로 경도된다. 보는 것, 시각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공연은 특히 비평을 하는 입장에서는 약탈적인 시각이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낯선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 할지에 대한 태도는 부족한 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4. 
녹녹은 관객들에게 모험도 탐험도 아닌, 낯선 세계로 ‘초대’하였다. 미지인에게 초대받고 낯선 세계에 60분간 몇일 밤낮을 함께 살아보는 경험을 제공한다. 그 곳에선 말이 통하지 않거나 말이 필요없는 세계일지 모른다. 처음 우리가 낯선 이들과 조우할 때,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것이, 손짓과 몸짓이 아닐까. 바디뮤직은 목소리대신 몸소리를 통해 위협하지 않고, 우렁차지 않고, 요란하지도 않게, 정확하지만 차갑지 않게 마음을 전하려는 울림으로 활용하도록 노력하였다.

5.
바디뮤직은 공연자들이 화려한 기교로 몸의 스펙타클을 보여줄 수도 있고, 신체에서 나오는 다양한 소리의 리듬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녹녹은 바디뮤직을 통해서 어떠한 몸으로 무언가를 전달하려 노력했다. 그건 메시지가 아니라, 어떠한 분위기 혹은 어메니티(amenity)였다. 그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선, 춤추는 손과 구름발, 나비와 손뼉 등 신체와 자연, 그리고 바디뮤직의 행위들이 조합되며 함께한 공연장에서 어떠한 에너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음악, 그러니까 뮤직은 혼자 감상할 수 있지만, 공연장에 찾아오는 건 하나가 되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공연은 공연자를 중심으로 집중되지만, 녹녹은 무대와 관객석 모두에 어메니티를 전달하기 위해 노려한다.

6. 
결국 녹녹이 집중하며 만들고자 한 건 바디뮤직 공연이란 미지의 세계를 착취가 아닌 환대의 공간으로 어떻게 전환하고자 한 건 아닐까. 환대란 손님에게 집중하는 능력이고, 손님이 자신의 영혼을 발견할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내는 능력이다. 결국 홍대의 역사 있는 소극장을 잠시나마 환대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 건, 말이 아닌 몸으로 표현하기 위한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이야기하지만 소통되지 않고 싸우는 세상에서, 오히려 말이 통하지 않고, 몸으로 전달하기 위한 시공간과 음악을 만든 것이 바디뮤직콘서트란 공간을 창조해낸 것이 녹녹의 능력이다. 

7. 
환대는 다른 사람의 외로움과 고통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다. 치유와 다르다. 치유는 다른 사람이 필연적으로 개입하는 노력이 가해져야 한다. 연극에서 일반화된 관객참여의 기법에서, 관람자를 중요하게 장치로 활용되거나, 관객들을 억지로 참여하는 모습을 연출하는 것이 아니었다. 녹녹은 관객참여가 아니라, 처음부터 관객과 함께 만들면서, 서로의 외로움과 기분을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와주려고 한다. 결국 미지의 세계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 녹녹의 다섯 공연자들은 외롭지 않게 손짓과 발짓을 맞추면서 관객들과 호흡하고자 하였다. 

8.
새로운 세상에 들어가면, 사람들은 천천히 배워간다. 둠짝쿵다슥, 관객들은 서툰 말을 배우듯 공연자들의 몸짓을 배워가면서 알아가며 이해한다. 소통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선 몇일 밤낮을 함께 하는 돌아다니는 시간이 필요하다. 서랍속 자장가, 오후의 해변 등 낯선 세계에서 손잡고 함께 산책하며 곁을 내주는 연출과정에서 우리는 ‘위안’을 얻게 된다. 그건 말이 아니었고, 몸으로 전했기에 더더욱 진하게 느껴질 수 있다.

9. 
녹녹은 나를 위한 공연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공연이라는 안식을 준다. 관객들이 서툴게 몸짓을 따라하는데, 어떤 개인을 집중하게 하지 않고,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일체감을 주려고 노력하였다. 이는 이 미지의 세계가 관객 하나를 초대한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함께 초대되었고, 낯선 세계의 미지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다. 마지막에 “일어나세요”란 말로 관객들을 깨우면서도 공연자와 관객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난장을 펼치지 않았던 것은 공연이 가져다 준 일체감을 일시적 축제로 해소하지 않고, 개별 관객들에게 고이 간직할 선물처럼 아쉬움을 남겨주기도 한다.

10. 
바디뮤직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원시성은 마치 낯선 이방인을 만나는 식민지적 시각을 내재할 수 있다. 어떻게 몸으로 저런 소리를 내지, 종종 그 신기함에서 멈춰서게 된다. 하지만 녹녹의 이번 바디뮤직콘서트, 노크가 두드리는 것은 낯선 세계에서 우리가 만나서 서로의 안정감을 가지고 평화로운 삶을 만들 수 있을지. 환대하는 세계로 전환하기 위해서, 필요한 관계의 태도를 느끼게 해줄 수 있었다. 비록 말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서도 모두가 나비처럼 자유롭고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