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에서]리뷰/펭귄

녹녹의 바디퍼커션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펭귄 (싱어송라이터, 기타리스트)

슬픔을 연기하는 배우에게 내가 언젠가 이렇게 디렉션을 준 적이 있어요. 연극 연출을 하는 하쏭이 말했다. 펭귄, 지금 기쁨이 없어요. 세상에, 슬픈 장면에서 슬픈 감정 연기를 하는 배우한테요. 그런데 난 그게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작품 속 배역으로서 정말 슬프지만, 그 안에는 그 감정을 인물을 배우로서 표현하고 있는 나의 기쁨과 즐거움, 예술가로서의, 예술하는 이의 환희가 또한 그 순간 있다고. 그게 없으면 그냥 일을 하는 거라고 말이죠. 

녹녹 멤버 하루에게 물었다. 조금 전에 하루가 오늘 무대에서 ‘나’이려고 집중했다고 말했었어. 지금 하쏭이 말한 것과 비슷한 거야? 응, 이번 공연 신곡도 세 곡이나 되고 정말 일이 많았거든. 그런데 공연 시작되고 무대에 일단 오르면, 물론 무대에서 할 연주를 엄청나게 연습했지만, 다 내려놓고 지금 순간의 내가 되려고, 지금 연주하는 나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해. 오늘 그랬어. 

오늘 공연에서 내가 느낀 특별함이 여기에 있었겠구나,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했다. 공연을 보며 오늘 하루와 쭈야에게서 빛이 나네, 했었다. 녹녹 멤버 네 명의 얼굴에서 몸에서 움직임에서 기쁨이 느껴졌다. 이게 넘치면 오버가 되고 너무 없으면 임무수행이 되고 마는데, 예술이 거기에 있는 것 같아요. 이날의 무대감독이기도 했던 하쏭이 덧붙였다. 나는 이날 하쏭이 말한 그 환희를 보는 행운을 누린 것 같다. 녹녹의 2023년 가을 단독공연, <The Sound Dance - 자연에서>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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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녹은 바디퍼커션 그룹이다. 나는 녹녹을 통해 바디퍼커션이라는 예술 양식를 알게 되었다. 녹녹이 추구하는 바디퍼커션이 어떤 예술인지—혹은 녹녹이 바디퍼커션을 통해 추구하는 예술이 무엇인지—는 녹녹의 공연들에서도 드러나지만, 녹녹이 전국을 돌며 열고 있는 워크숍에서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참석해 본 이로서 덧붙이자면, 몸으로 경험할 수 있다. 

녹녹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두드려 소리를 내다, 나에게서 (그리고 다른 이에게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처음으로 신경을 써서 들어보게 되는 것이 시작이다. 내 몸이 이런 소리를 갖고 있구나, 여기 내 몸이, 가슴이, 허벅지가, 정수리가 있었구나 비로소 깨닫는다. 사람마다 소리가 다 다르다는 걸 발견한다. 나는 저런 소리 못 내는데, 하다가 저분은 저런 소리가 나는구나! 나는 또 이런 소리가 나네, 하며 사람마다 모두 다른 자신만의 몸을 갖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어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목소리가 모여 합창을 하듯, 각자 다른 몸을 두드려서 합주하는 즐거움으로 나아간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한 녹녹의 바디퍼커션은, 사람이 자신의 몸을 두드려 소리를 내고, 그럼으로써 자기 몸의 소리를 가진 주체가 되고, 또한 사람마다 각자의 고유한 몸과 소리를 가진 존엄한 존재임을 인식하는 예술 양식이다. 녹녹은 이러한 예술 철학을 콘서트 형태의 공연에도 공들여 담아 왔다. 2021년 여름의 <에브리바디퍼커션>, 2022년 겨울의 <노크> 공연을 다룬 여러 리뷰들이 녹녹의 공연에 녹아있는 자기 해방과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기쁘게 짚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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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에브리바디퍼커션>, <노크>에 이어 세 번째로 본 녹녹의 단독 공연 <The Sound Dance - 자연에서>에서 나는 이제까지와는 또 다른 특별함에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선유도공원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북서울꿈의숲에서 공연한다는 말을 듣고서 무심코 꿈의숲아트센터 ‘공연장'으로 갈 뻔했던 나는, 공연이 시작되고서야, 그러니까 네 명의 녹녹 멤버들이 숲을 배경으로 난 길을 따라 새 소리를 노래하며 걸어들어 올 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에서 했어야 했구나. 숲에서. 나무 곁에서. 자연에서. 굳이 야외를, 그것도 공연을 위해 구획된 공간도 아닌 숲 속 공원의 공간을 택한 이유. ‘자연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

휘파람을 부는 입 모양으로 내는 새 소리. 이게 정말 새 소리일까, 저 사람들이 내는 소리일까. 구분하려고 기울인 귀에 비로소 우릴 둘러싸고 있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공연장에서는 제거되는 소리들. 바람이 지나가며 나뭇잎이 흔들리고, 해가 내려앉으며 저녁 숲이 내는 소리. 수런수런하다 귀를 기울이며 서서히 잦아드는, 나와 옆 관객이 내는 소리. 경청이란 기울여 듣는다는 뜻이던가, 어느 새 온 몸이 기울어진 것을 느낀다. 무대의, 아니 숲속의 녹녹이 내는 소리를 들으려고. 

자연스레 녹녹의 뮤직비디오 <숲을 지나>가 떠올랐다. 실내 공연에서도 잘 들리지 않을 때가 있었던, 손톱을 비벼 내는 소리, 토닥이듯 팔을 쓰다듬는 소리, (많은 이들이 신기해하고 좋아하고 따라해 보는) 둥글게 모은 입술 위로 손바닥을 두드려 내는 소리 등을 훌륭하게 잡아낸 음향의 공로에 힘입어, 녹녹이 들려주는 소리가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게 귓가에 다가왔다. 

앞서 말한 모든 가치들에 더불어, 녹녹의 바디퍼커션에는 치유의 힘이 있다. 원하는 소리만을 위해 조율되지 않은 공간에서 그 힘은 오히려 더 강하고 포근하게 사람들을 감싸안았다. 치유된다, 그냥 쉰다, 이완된다는 느낌. 귀가 가면서도 긴장되지 않고, 풀어지고 느슨해지고 쉬어지는 기분. 편안한 소리를 들을 때의 즐거움. 좋은 소리가 (귀 만이 아니라) 몸에 닿을 때의 행복. 공연이 끝나고 빠르게 어둠이 내리는 숲을 천천히 걸어나가는 관객들의 입에서, 한동안 너무나 흔했던 ‘힐링’이란 말이 파도처럼 오르내렸다.  

바디퍼커션 ‘밴드’ 녹녹의 공연을 보는 즐거움 또한 이전에 비해 컸다. 첫번째 두번째 공연을 볼 때는 몸으로 내는 소리를 처음 접하는 경이감과 멤버들의 물 흐르는 듯 맞아떨어지는 앙상블에 가려 미처 보지 못했던,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보컬처럼 밴드를 이끄는 어리, 든든한 베이스처럼 사운드를 지탱하는 신, 바이올린과 우쿨렐레, 리코더를 더하며 색채감을 불어넣는 쭈야와 하루.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이 들려주는 자기 소리, 이들이 한데 합이 맞을 때의 즐거움, 합을 맞추는 즐거움을 보고 듣는 흐뭇한 쾌감이 큼지막한 선물처럼 나에게 안겨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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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내가 본 것에 대해서 적어야겠다. 나는 녹녹의 팬으로서 이날 내가 목격한, 멤버들의 얼굴에서 반짝인 빛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한지를 바른 문 안쪽으로부터 은은히 배어나오는 등불 같았던 빛 위로 바디퍼커션의 리듬이 춤출 때, 나는 노을녘 귤빛으로 물든 하늘 위로 반짝이는 불꽃놀이를 연상했다.  

나는 그 빛이 앞에서 하쏭과 하루의 말을 길게 끌어다 쓰면서 묘사했던, 예술가로서의 환희라고 믿고 있다. 이는 실은 바디퍼커션만이 가진 특별함이 아니라 공연예술이 갖는 보편성 위에서의 특별함이다. 예술적 표현의 충실성과 표현하는 예술가의 자기인식이 한 점에서 만나는 순간의 특별함. 

그러니까 나는 이날 녹녹의 공연이 특별했고 탁월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랜 시간 어리, 하루, 쭈야, 신, 카펠라의 다섯 명이었다가 올해 네 명이 되고, 객원 멤버 루피와 문민 둘이 함께하여 넷 더하기 둘이 되었다가, 이날 오랜만에 카펠라가 잠시 함께하여 다섯, 그리고 다섯 더하기 둘로 무대에서 함께 연주하는 모습과 함께, 특별히 오래 기억하고 싶은 공연이었다고.

— 2023. 11. 7.